제네바 신앙고백과 제네바 교회와 예배 조직에 관한 논제들
우리는 칼뱅의 저술을 말할 때 제일 먼저 사부작 기독교강요를 언급하지 않을 수없습니다. 그러나 칼뱅(1509~1564)은 55년의 현대인의 기준으로 보면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에 기독교 강요 외에도 허다한 글을 남겨놓았습니다. 그의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생애, 또한 늘 병마에 시달렸던 칼뱅의 생애를 고려할 때, 작품의 목록에서 우리는 그의 왕성한 창작력에 놀람을 금치 못합니다.시의회의 기록에 의하면 1536년 11월 10일에 제네바 신앙고백」이 파렐과 칼뱅에 의해 시 당국에 제출되었으며 당국에 의해 접수되었고 보다 상세한 검토를 위해 보류되었습니다. 「제네바 신앙고백은 만일 그의 단독 저작이 아닐지라도 적어도 파렐과의 공동 저작으로 인정할 근거는 충분합니다. 이로써 목회 행정가 칼뱅의 면모가 처음으로 드러납니다. 기독교 강요초판과 같은 해에 쓴 이 문서의 첫 번째 조항이 분명히 그 이하의 내용이 출발하는 근원,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지시한다. 믿음과 종교의 기준은 오직 성서뿐입니다.칼뱅은 1537년 1월 16일 시의회에 제네바 교회 조직에 관한 제안을 제출했습니다.그러나 칼뱅이 제출된 초안은 문안대로 수용되지 않았습니다. 매월 성찬을 거행하자는칼뱅의 요청은 거부되었고 년 4회 시행의 절충안으로 타협되었습니다. 또한 권징과 출교의 도입도 승인되지 않았고 혹은 권징 위원회의 설치도 승인을 받지 못했습니다. 신앙고백은 그전 해에 승인되었지만, 시의회는 시 당국자들과 시민들 신앙 고백에 대한 준수를 서약해야 한다다는 권고를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혼인 문제를 다루게 될 위원회도 설치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이 문서에 표현된 종교개혁 프로그램입니다.
사돌레토에게 보낸 칼뱅의 답변
칼뱅은 제네바에서 추방된 후 한동안 바젤로 가서 다시 조용히 학문에 몰두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자 부처의 권유에 의해서 스트라스부르의 프랑스인 난민 교회를 맡게 되었습니다.1539년 3월 카르팡트라의 주교 사돌레토는 제네바 시의회와 시민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로마 가톨릭교회로 돌아올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교양 있는 인문주의자인 사돌레토는 제네바 시민들을 상대로 신, 종교, 성서에 대해 설득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에 의하면 교회 일치 파괴의 책임은, 사전에 다른 스위스 도시들에서 활동하던 일부 교활한 인간들에게 있다. 그의 말은 제네바의 목사들, 특히 파렐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사기꾼과 새로운 일을 꾀하는 자로 매도되었다. 사돌레토의 서신을 받은 제네바 시의회는 답신을 보내기로 결정했지만, 누구에게 답신을 의뢰해야 할 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에 베른시는 칼뱅을 적임자로 추천하였습니다. 칼뱅은 처음에는 주저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제네바의 추종자들과 서신 교환을 하고 있었다. 결국 칼뱅은 동년 9월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자들의 권유로 답신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가 답신을 작성하는 데 소요한 시간은 불과 6일이었다. 그는 종교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서술하였다. 그는 사돌레토가 주장한 교회 개념을 반박하면서, 교회는 그리스도가 선포되고 신앙되는 곳에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새로운 것을 꾀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성서에 의지하지 않는 가톨릭 신학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분열시킨 것은 종교개혁자들이 아닙니다. 자신들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군기가 있는 곳에 있을 따름이다. 칼뱅은 이런 방식으로 조목조목 사돌레토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교리 문답과 헌법
칼뱅이 없는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고, 주교 사돌레토가 제네바 시민들에게 가톨릭 신앙으로 복귀할 것을 권유하는 서한을 보낸 것을 계기로 해서 제네바 시는 칼뱅을 다시 데려오기에 이릅니다. 1541년에 9월 13일에 귀환한 칼뱅은 제네바 교회 헌법 초안 집필에 착수합니다. 칼뱅은 그 동안 부처가 목회하던 스트라스부르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목사, 박사, 장로, 집사의 직분을 두었고, 종전대로 장로들에게 시민의 윤리를 감독하게 하고 성찬식에 앞서서 윤리적 검증을 통해 성찬식 참여를 허락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처럼 제네바 교회는 말씀 선포와 성례전 거행에 이어서 교회 훈련을 교회의 3번째 표징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칼뱅은 1542년에 제네바교회 교리 문답을 작성했습니다.칼뱅은 새로운 제네바 교회 헌법 초안에서 1537년과 마찬가지로 성만찬을 매달 1회 집행하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수정안에 의하면 여전히 1년 4회, 즉 부활절, 성령강림절, 9월 첫 번째 주일, 그리고 성탄절에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이밖에 이 새로운 교회 헌법은 혼인, 장례, 병자 방문, 수감자 방문,어린이 교리 교육에 관한 규정들로 끝을 맺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