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턴
그는 위대한 사람입니다.파스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위대한 사람이 되려면 한 가지 극단에 이른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양극단의 미덕을 모두 갖추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상태를 아울러야 합니다.서사시에 대한 그의 문장은 서사시의 간략한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가 말한 내용이 무엇이지 알고, 그가 느낀 것을 느끼고, 그가 마침내 선택한 것이 실제로 무엇인지 이해하고,그 최종 선택에 의거한 행동의 실체가 무엇인지 깨닳으려면, 우리도 서사시에 주목해야 합니다.서사시라는 문학의 역사는 우리가 실낙원을 읽는데 있어 적어도 밀턴의 전기만큼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좁쌀 교황
문학계는 해체되어 서로 소통하지 않는 창문 없는 모나드의 집합으로 변합니다.각 모나드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좁쌀만 한 자기의 영토의 교황이자 왕으로 등극했습니다.사람들이 짓기 좋아하는 시가 좋은 시가 아니라 듣고 싶어 하고 읽고 싶어 하는 시가 좋은 시입니다.청중을 너무 자주, 너무 많이 놀라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 구전시의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뜻밖의 내용은 듣는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이해하고 즐기는 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립니다.듣는 사람을 주춤하게 만드는 시구는 구전시에서 재앙입니다.시인이 아무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들려준다면,뮤즈의 영감을 받은 시인이 굳이 존재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이 두가지 요구가 만나면, 시어, 즉 모든 시의 모든 부분에 익숙하지 않은 언어가 절대적으로 필요해집니다.이것과 비슷한 예로 성탄절에 먹는 칠면조와 플럼푸딩을 꼽을 수 있습니다.그 매뉴를 보고 놀라는 사람은 없지만, 그것이 평범한 음식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아 봅니다.다른 사례로는 예배 언어를 꼽을 수 있습니다.꾸준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예배 시간에 당황할 일이 없습니다.예배의 상단 부분을 외우고 있으니 말입니다.그러나 그것은 일상 언어가 아닙니다.서사시의 시어, 성탄절 메뉴, 예배 언어는 모든 의식의 사례입니다.즉, 일상 용례와는 구별되지만 각각의 영역 안에서는 아주 익숙한 것들입니다.이성과 의지는 요동치는 우리의 감정에 의식이라는 패턴을 부여하여 즐거움이 금세 사라지지 않게 붙들어 주고, 슬픔을 좀더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호메로스
인간을 둘러싼 변하지 않는 환경을 강조하는 것입니다.세상의 영속성, 무심함, 우리가 웃건 울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비통하면서도 위안이 되는 사실, 이것이 경험 속으로 들어와 현실 특유의 압박이 되어 우리를 짓누릅니다. 상상의 세계에서는 잘 찾아 볼 수 없는 이런 압박이 호메로스의 시에는 존재합니다.바다, 신들, 아침, 산을 정형화한 그의 낭랑한 시구들을 듣노라면, 그것이 사물에 대한 시가 아니라 사물 자체인 것처럼 느껴집니다.호메로스 시의 수직으로 강하게 비치는 빛 안에서는 인간이 아니라 신들이 창조합니다.이로 인해 호메로스의 시는 비범하리만치 믿음직한 것이 되었습니다.변하지 않는 배경의 객관성이 호메로스의 시의 멋이라면,베어울프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 로망스적입니다.호메로스에겐 없는 선악에 대한 인식이 있습니다.후대에 나온 베어울프가 호메로스와 완전히 다르게 구사하는 기막힌 기법이 등장하는데,우리가 대부분이 성경 시편에서 처음 만났던, 변주 내지 평행법입니다.모든 이야기에서 주인공의 집과 땅이 차지하는 중요성, 딱 그정도만 있을 뿐입니다.오디세우스가 집에 돌아가지 못했을 경우 세계나 그리스가 크게 달라졌을 거라는 주장은 아예 찾아 볼 수 없습니다.호메로스의 작품에서 서사시의 위대함은 무의미한 흐름을 배경으로 인간의 비극이 쌓여 간다는 데 있습니다.그것이 더더욱 비극적인 이유는 영웅의 세계 위로 확실한 허무가 드리워 있기 때문입니다.베르길리우스의 세계에서는 고통이 의미가 있고 숭고하나 결심의 대가이지만,호메로스의 세계에서는 고통이 있을 뿐입니다.일리아스의 교훈은 우리가 지상에서 지옥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다.호메로스의 시에는 누구도 어둠에 맞써 싸우지 않았습니다.어떤 존재가 서서히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된 과정,즉 성장이라는 현상은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그들이 원한 것은 시간을 초월한 것,변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시간은 그저 흐름에 불과했습니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그는 시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혁명을 이루었는데,국가적 전설을 활용하여 그 안에 더 큰 테마가 함축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게 만든 것이었습니다.한정된 수의 사람들만 등장시키면서 마치 국가적, 또는 우주적 사안이 연계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전설적 과거 안에서 사건을 배치하면서도 그 사건이 그때 이후와 현재에 일어난 사건들의 전조였다는 느낌이 들게 했습니다.베르길리우스와 밀턴 이후에는 이런 작법이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그들은 그녀에게 이끌려 머나먼 바다를 지치도록 떠돌았습니다.로마 탄생의 산고는 이렇게 크고도 컷습니다.산고가 핵심입니다.그들은 호메로스의 영웅들처럼 자기 이익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그들은 소명을 받은 사람들,짐을 짊어진 사람들입니다.이 작품은 시간의 심연이라는 관념을 실질적으로 담아 낸 첫 번째 시입니다.베르길리우스 작품의 핵심 단어는 고대의, 옛, 오래된입니다.라티니우스 왕의 궁전은 호메로스에 나오는 어떤 집과도 아주 다릅니다.숲속에 있고 예부터 외경심으로 인해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황금가지를 보고 놀라는 장면은 제가 볼 때 최고로 뛰어난 상상력의 사례입니다.베르길리우는 단순한 시간의 길이보다 더 미묘한 것을 사용합니다.우리 삶 속에서 길이뿐 아니라 굽이도 있습니다.어떤 의미에서 아이네이스 전체는 세계 역사가 변해 가는 이야기,문명이 동양에서 서양으로 옮겨 가는 이야기,옛 세상의 '작게 남은 것"이 새 세상의 기원으로 변화하는 이야기입니다.애가 시인이 이런 대목을 노래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놓고 인생무상을 곱씹겠지만,아이네이스에서는 다릅니다.모두가 유피테르의 운명이 정한 일이기 때문이고,바로 이런식으로만 모종의 위대한 일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아이네이스의 독자들은 너무나 많은 일을 겪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그 시를 제대로 파악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도 사춘기에 머물 수 없습니다.위대한 이행이라는 테마는 베르길리우스가 보여 주는 소명의식과 긴밀히 이어져 있습니다.경건은 고된 길도 극복한다.베르길리우스는 이런 생각으로 시에 새로운 차원을 덧붙였습니다.아이네아스의 실체는 성인 남자, 아킬레우스는 열정적인 소년에 불과합니다.유렵의 시는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장성한 어른이 됩니다.헛된 눈물이 떨어지는 동안에도 마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이것이 베르길리우스의 분위기입니다.호메로스에게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할 대상, 자신을 넘어서는 무엇이 없습니다.불행하거나 행복하거나 그것이 전부입니다.아이네아스가 사는 세계는 다릅니다.그는 행복보다 더 중요한 그 무엇을 바라봅니다.의무와 욕망의 이중인격을 입고 나타나는 것이 소명의 본질이고,베르길리우스는 둘 모두를 잘 보여 줍니다.소명을 따른다고 해서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하지만 소명을 듣고 그것을 따르지 않는 이들에게 행복은 없습니다.지금 있는 땅에 눌러 앉고 싶은 비참한 갈망과 운명의 호령으로 그들을 부르는 저 먼 땅 사이에서 이 두 행에서 온전히 거룩해진 사람이나 동물의 수준으로 떨어진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이 경험하는 삶의 특징을 완벽하게 묘사해 냈습니다.그가 위대한 기독교 시인에 준하는 인정을 받게 된 것은 네 번째 목가때문만이 아닙니다.그의 시가 위대하다는 말은 그로 인해 일리아스와 같은 유형의 시가 다시는 위대한 작품일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베르길리우스를 넘어서는 그 어떤 서사적 발전이 가능한가, 이것이 진짜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아이네이스이후 모든 서사시의 제재가 명백하게 종교적인 색체를 띠게 된 것은 베르길리우스가 정해 준 것입니다.
실낙원
실낙원에서 낙원에 대해 아무 말도 안할 수는 없습니다.독자의 상상력을 깨운다는 것은 명확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내면에서 낙원의 빛을 다시 찾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수사에서는 상상력이 감정을 위해 따라서 장기적으로는 행동을 위해 존재 하지만,시에서는 감정이 상상력을 위해 존재합니다.우리가 모든 시에서 최소 공배수를 찾는다면, 차이가 나는 요소를 다 벗겨 내었을 때 남는 최소공배수에 해당하는 것들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싶은 유혹을 받을 것입니다.좀 더 나은 길 좀 더 나은 길이 있습니다.기사의 옷을 벗기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갑옷을 직접 입어 보는 것입니다.호메로스를 읽는 동안에는 자기 힘이 미치는 한 아카이아의 대장이 되어야 하고,존슨전을 읽을 때에는 18세기의 런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때 비로서 저자가 기록할 당시의 정신으로 작품을 읽을 수 있고 터무니없는 비평을 피할 수 있습니다.신학을 제거한 밀턴의 사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밀턴과 아우구스티누스 밀턴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이고,대체적으로는 기독교 전체의 이야기입니다.선은 악없이 존재 할 수 있지만, 악은 선없이 존재 할 수 없습니다.
선한 자연을 창조하심으로 그분의 자애로움을 보이시듯,악한 의지를 이용하심으로 그분의 정의를 보이십니다.
아리우스주의
즉, 삼위의 영원한 공존과 동등한 신성을 믿지 않았습니다.밀턴은 정직한 작가입니다.밀턴이 실낙원에서 아리우스주의를 내세운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당신의 분노를 제게 내리소서. 저를 인간으로 보소서 성부께서 네세우시고 성자가 받아들이는 것이 교리만 놓고 보자면 실낙원은 압도적으로 기독교적인 작품입니다.동떨어진 소수의 몇몇 대목을 제외하면 딱히 개신교적이거나 청교도적이지도 않습니다.기독교의 위대한 중심 전통을 제시 할 뿐입니다.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모든 기독교계가 받아 들일 수 있는 내용입니다.자존심이 짓밟힌 느낌 그는 스스로 열등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그는 메시야가 천사들의 대장으로 선언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열등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반역한다는 것은 자신이 힘의 근원에 반역하는 것입니다.거짓말쟁이보다는 거짓 자체 자기모순의 화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의 심판은네 뜻대로 되게 해주마라는 표현으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사악한 캐릭터를 상상하려면 평소 늘 해오던 일, 하다가 지친 일을 멈추기만 하면 됩니다.하지만선한 캐릭터를 상상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해야 하고 자신과 다른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타락한 천사와 타락한 인간은 아주 비슷합니다.
내것은 내것
사탄이 보여 준 스스로에 대한 편집증적 관심입니다.그는 자신이 되고 자신 안에 머물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기를 소원했고 그의 소원은 성취되었습니다.밀턴은 사탄의 존재 양식이 공허하고 지루한 것임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사탄은 계속 사탄으로 머물기를 원합니다.이것이 하늘에서 섬기기보다 지옥에서 다스리는 것이 낫다는 그가 내린 선택의 진정한 의미입니다.지옥에서 나가는 단 하나의 문은 악마들 본인의 손으로 단단히 잠가 놓았습니다.그로므로 그 문이 밖에서도 잠겨 있는지 여부는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실낙원은 세상의 객관적 질서와 자기애에 사로잡힌 반역자들이 그 질서를 파괴하려고 벌인 시도와 그들의 반역을 꺽고 더 크고 복잡한 질서로 흡수하는 승리를 다룬 시입니다.실낙원은 영적인 삶을 향유하는 자리가 아니라, 영적인 삶의 조건이 되는 밑그림 전체를 관조하는 자리로 우리를 부릅니다.실낙원은 제재는 경건이 아니라 동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종교적 경험을 시적으로 표현한 종교시입니다.
루이스의 세상을 보는 안경
밀턴은 우주 자체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이 책은 문학 작품을 해석하는 안경과도 같습니다.새롭게 도전하는 서사시라는 장르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해석하는 시야를 조금이나마 확보 할 수 있었습니다.루이스만의 독특한 세계관에 다시금 경탄하고,그를 통해 바라보는 세계는 늘 즐겁고 경이로운 모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