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이입 충동 vs 추상 충동
빌헬름 보링거(Wilhelm Worringer, 1881~1965)라는 사람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처럼 축복받은 땅에선 인간과 자연 사이에 행복한 범신론적 친화 관계가 이루어진다고 말입니다.이때 사람들은 감정 이입 충동을 갖게 되고,그 결과 그리스 예술처럼 유기적이며 자연주의 적인 양식이 발달합니다.하지만 이집트처럼 자연 환경이 척박한 곳에선 광막한 외부 세계가 인간에게 끊임없이 내적 불안감을 불러 일으키게 게 되는 것입니다.이때 사람들은 이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해 추상 충동을 갖게 되고, 그 결과 추상적, 기하학적 양식이 발달합니다.눈에 보이는 세계 저편 피안의 세계(이데아 세계)가 있다고 가르친 플라톤주의는 쉽게 기독교와 융합할 수 있었습니다.몇 백 년이나 떨어진 플라톤주의를 당대의 기독교에 전해준 건 플로티노스의 신플라톤주의였습니다.아우구스티누스는 플로티노스가 좀 더 오래 살았던들, 단어 몇 개만 고침으로써 기독교도가 되었을 거라고 말했다습니다.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켈란젤로 vs 다빈치
플로티노스처럼 아우구스티누스도 예술은 모방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그의 논증은 간단하고 재미있습니다.동물들도 모방을 하지만 예술을 갖고 있진 못합니다.예술은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 있던 형상을 실현한 것 입니다.결국 예술이란 예술가의 발명, 그의 상상력의 산물이란 얘기다. 하지만 자연의 모방이든 내적 형상의 실현이든, 예술가가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는 거짓이 아닙니다.왜냐하면 거짓은 남을 속일 의도가 있을 때만 쓸 수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다빈치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읽고 과학적 관찰과 실험에 관심이 있었다면,미켈란젤로는 신플라톤주의의 신비주의에 기울어져 있었습니다.다 빈치가 자신을 합리적 규칙에 따라 작업하는 과학자라고 생각했다면,미켈란젤로는 영감에 따라 작업하는 고독한 천재로 의식하고 있었습니다.나는 다만 잉여인 것을 제거할 뿐입니다.조각상은 거기에 그렇게 있었습니다.그에게 조각이란, 곧 쓸데없는 부분을 제거함으로써 돌 속에 갇혀 있는 그 형상들을 해방하는 작업이었습니다.정과 망치로 돌 속에 갇힌 형상을 끄집어내면서, 아마 그는 신께서 자신의 영혼도 그렇게 육체의 감옥에서 구원해주기를 바랐을 것입니다.다 미켈란젤로의 이 말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최후의 심판을 보기 바랍니다.성 바르톨로메오는 피부 껍질이 벗겨지는 순교를 당했다고 전해 집니다.바르톨로메오의 손에 들려 있는 얼굴 가죽에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습니다.
표상, 구상, 오성, 개념, 판단
다양한 감각 자료를 하나로 모으면 머릿속에 어떤 상(像)이 떠오릅니다.이걸 표상이라 하겠습니다.다양한 감각 자료를 모아 이렇게 하나의 표상으로 만들어내는 능력을 생산적 구상력 (상상력)이라 합니다.구상력은 감각 자료를 뜯어 맞춰 표상을 만든 뒤 이를 오성으로 가져갑니다.그럼 오성은 이걸 개념의 상자 속에 집어넣어 판단을 내립니다.이들은 그 유명한 그리스의 삼미신입니다.이렇게 상상력과 오성이 딱 맞아떨어져 하나의 개념 (삼미신) 속에 쏙 들어갈 때,인식이 성립합니다.하지만 취미 판단은 본디 인식이 아닙니다.여기서 상상력과 오성은 개념을 만들어낼 필요에 구애받지 않습니다.양자는 서로 조화를 이루며 자유로이 유희하는 상태에 들어갑니다.개념의 틀에 갇혀버리지 않고.이렇게 생각해보겠습니다.피타고라스는 천체 운행과 음악과 수학 공식사이에서 어떤 동일한 구조를 발견했습니다. 자연계에서 이런 조화를 발견할 때, 우리는 미적 쾌감을 느낍니다전혀 관계없던 두 사물의 표상이 하나로 딱 맞아 떨어짐으로써 상상력과 오성이 조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하지만 이 경우에 천체 운행과 음악과 수학 공식이 합해져새로운 '개념'을 낳는 것도 아니고, 이 발견이 천문학적 또는 수학적 의의를 갖는 것도 아닙니다.우리는 그저 놀이하듯 그 조화를 즐기면 되는 것입니다.
칸트의 형식 미학
미에는 목적이 없습니다.다만 우리 마음에 들기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사물이 아름다운 건 내용 때문이 아닙니다.가령 파리스의 심판의 내용에 흥미를 느낀다면, 그건 순수한 미적 관조가 아닙니다.아름다움은 형식에, 말하자면 선들이 그려내는 형태에 있습니다.우리도 루벤 스와 동일한 주제로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그렇다고 우리 그림이 그의 작품만큼 아름답겠는가는 의문이 있습니다.따라서 미는 형식에 있는 것이니다. 미는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형식,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유로운 '드로잉과 구성입니다.여기서 칸트는 완전히 새로운 미학, 형식 미학의 선구자가 됩니다.아리스토텔레스는 운율을 만드는 기술은 가르칠 수 있어도,은유 를 만드는 기술은 가르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은유를 만드는 데 에도 분명히 어떤 규칙이 있긴 있을 것입니다.논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어도 이 특별한 규칙은 오직 자연의 혜택을 받은 예외적인 사람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술의 종언, 헤겔
헤겔은 이념과 매체가 행복하게 조화를 이루던 그리스 시대 이후,예술은 내리막길을 걷는다고 생각했다. 낭만 예술에 이르면 이미 내용과 형식의 행복한 조화가 깨지고 예술은 서서히 저물어갑니다. 예술의 미래는 종교에 있습니다.가령 그리스의 신들은 조각 속에 자신을 드러냈지만, 기독교의 신은 자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더 이상 감각적 매체로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이제 이념은 감각이 아니라 표상을 통해 드러나야 합니다.이미 시는 관념적 표상을 표현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니 말입니다.하지만 종교는 다시 철학이라는 개념적 사유에 자리를 내줘야 합니다.이때쯤 세계의 역사는 저녁 무렵으로 접어든다.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부엉이 즉,철학은 해질녘이 돼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고 합니다.부엉이가 날개를 펴고 힘차게 밤하늘을 날아오르면서,세계의 역사는 완성에 도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