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세계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습니다.명백히 변칙적이고 무의미한 세상의 표면을 꿰뚫어 보고 현실의 구조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대처도 달한다는 뜻입니다.무신론은 지적으로 취약하고 실존적으로 불만족스럽다는 점을 서서히 깨닫게 됩니다.저자는 무신론이 정서와 실존 면에서 약하지만, 지적인 면에서 공정한 것이 더 낫다는 견해를 고수했다고 말합니다.인간의 상상력이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어 진짜 대상을 찾습니다. 그래서인지 진정한 예술가들은 모두 초월적인 실재를 만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곧 자신의 이미지는 베일을 통해 비치는 사물의 그림자라고 느끼게 됩니다.마음을 강하고 끈질기게 파고드는 기독교적 상상력.이 이러한 내면의 그림자를 더욱 선명하게 그리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인간의 내면에는 지성의 대상이나 경험으로 채울 수 없는 강렬한 갈망이 있습니다.그 같은 갈망을 기쁨라고 부르고 갈망은 기쁨의 궁극적 원천과 목표인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본향을 찾아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향해 기쁨의 화살을 쏘아 단순한 무신론과 불가지론에서 우리를 깨우고 본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게 하십니다.해가 보여서 믿는 것이 아니라 해가 떠서 모든 것이 보이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존재라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설명입니다.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온 세상은 더 영원하고 견고한 무언가가 투영된 것입니다.세계관이 넓어지면 세상과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우리는 죄인을 사랑하되 죄악을 경계하면서 실제적이고 희생인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우리에게 성찬의 떡과 포도주 다음으로 가장 거룩한 것은 이웃입니다.C.S루이스에게 우정이란 활력과 변화를 뜻합니다.우정도 공을 들이고 잘 가꾸어야 잘 자라는 법입니다.우리는 진정한 우정을 가꾸기 위해 시간과 힘을 충분히 들이고 있는지 숙고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실화가 된 신화
인간의 신화에는 진리의 전부가 아니라 단편만이 희미하게 드러난다.그것은 참된 빛의 파편과 같습니다.하지만 진짜 이야기 전체가 밝혀지면 파편으로만 보이던 사물의 모든 진리와 지혜가 성취됩니다.고대 북유럽의 신화는 폐기해야 할 악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 자체로는 도달할 수 없는 더 중요한 것을 이해하는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좋은 이야기가 상상력을 사로잡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나니아 연대기 속에서 아슬란의 이야기를 자의 이야기 중심에 둔 루시에게는 새로운 정체성과 목적이 생깁니다.유스터스는 실제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지독한 고통을 느끼기도 합니다.유스터스를 우물 속에 넣고 유수터스는 인간으로 회복되어 깨끗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떠오릅니다.아슬란이 유스터스의 몸을 찢어버리는 생생한 이미지에서 분명히 나타나듯이 유스터스는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아슬란이 루이스의 상상력 속으로 뛰어들자 이야기는 형태를 갖추어갔습니다.하나님을 향한 귀소 본능이 있다고 보는 것이 기독교의 창조 교리를 읽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루이스의 교육 철학에서 중요한 주제는 좁은 시야로 실재를 제한하는 것보다 시야를 넓혀서 실재를 받아들이는 편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세상을 축소해서 세상을 정복하겠다는 것입니다.곧 실재를 이론으로 축소할 수 있다는 사상입니다.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우리에 갇혀서 야수의 본성을 보여줄 수 없게 된 위풍당당한 호랑이들처럼 합리주의라는 우리에 갇혔습니다.기독교 교리란 하나님이 적절한 언어로 이미 표현하신 것곧 기독교 신앙 자체의 대서사를 인간의 개념과 사상으로 번역한 것이라고 루이스는 말합니다.이론은 실재를 설명하는 전체와 종합이 아니라 일부와 축소입니다.그리스도 예수를 이론의 철창에 가두고 길들이고 지배하기란 아주 쉽습니다.그리스도가 우리를 다스린다는 점,그를 더욱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지성의 통찰과 범위를 넓히는 것이 제자로서 해야 할 일이라는 점을 환기합니다.
기독교 변증
기독교는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입니다.아슬란의 주된 역할은 사람들이 자신의 실체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아슬란은 자기만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풀어주는 늠름한 사자입니다.나니아 연대기'와 '반지의 제왕'을 관통하는 공통된 주제는아름다운 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루이스와 톨킨은 약하고 초라한 인물들이 막중한 임무를 맡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보여줍니다.보잘 것 없는 사람들도 고귀하고 선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고 만물의 큰 계획 안에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이해합니다.변증은 나중으로 미룰 일이 아닙니다.우리는 변증해야 합니다.너희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로고스)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아폴로기아)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말입니다. 다음과 같이 변증해야 합니다.청중의 언어로 번역해야 합니다.신학을 남김없이 번역해야 합니다.신학을 일상어로 바꿀 수 없다면,생각의 체계가 없다는 뜻입니다.변론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말하지만 실은 "통찰을 하고 있으며 그 통찰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인간의 관찰과 경험이 하나님의 생각과 잘 어울린다는 점을 보여준 것입니다.우주를 운행하고 있는 그 무언가가, 내 안에 법의 형태로 나타나 옳은 일을 하라 재우치고 잘못을 저지르면 책임과 불편을 느끼게 하는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 의심을 가져야 합니다.이것은 우주를 다스리는 주체를 가리킵니다.그 주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온전히 일치합니다.그가 기독교를 믿게 된 이유,상상력이 결핍된, 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차츰 환멸을 느꼈기 때문입니다.합리적인 논쟁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하지만 믿음이 자라는 풍토를 유지해줍니다.이성과 상상을 씨와 날로 삼아 풍성한 진리 개념을 짜면 사물이 정확하게 보이고 내부의 일관성을 이해하게 된다.이성과 상상을 경쟁이 아닌 협력 관계로 봅니다.
연대에 대한 속물적 태도
현 시대의 일반적인 지적 기류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고, 과거는 과거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불신하는 태도야 말로 연대에 대한 속물적 태도입니다.독서,특히 고전의 필요성이 대 되는 이유입니다.고전을 통해 자신만의 개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더 깊고 풍부한 세계관을 가질 수 있도록 훌륭한 대안을 제시합니다.내 눈만으로는 부족하니 남들의 눈을 통해 볼 것입니다.훌륭한 문학작품을 읽으면 나는 천명의 인물로 변하지만 여전히 나 자신으로 남습니다.그리스 시가 노래하는 밤하늘처럼 무순한 눈으로 세상을 보지만 보는 것은 여전히 나 자신입니다.교육이란 그 안에서 사는 것이다.곧 사고방식을 체험하고 그대로 살아보는 것입니다.교육이란 우리를 바꾸는 것이다.현재에 몰두하고 있는 근시안을 깨뜨리고 세계관을 넓히고 신앙을 깊숙이 탐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하나님은 인간이 즐거워할 때는 작게 속삭이시고, 양심에 따라 행동할 때는 크게 말씀하시고 고통스러워할 때는 고함을 치십니다.
고통의 문제
고통은 귀먹는 세상을 깨우는 하나님의 확성기입니다.고통은 "만사형통"의 환상을 깨뜨리고 인간은 반항하는 영혼의 요새에 진리의 깃발을 꽂으시는 하나님께 투항합니다.하나님의 아들은 고통 속에서 돌아가셨습니다.인간이 고통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고통을 그리스도의 고통과 같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현세를 위해 최선을 다한 그리스도인들은 내세에 대한 생각으로 충만했습니다.천국을 목표로 삼는 것은. 지평선을 올리고 기대치를 높인 후, 천국의 빛을 받으며 지상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