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신학의 시녀
사실로 보면 그러한 단순한 주장이 가능할 법도 한데, 중세 기독교 사상을 지배한 모든 사람들 가운데 최고봉은 아우구스티누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퀴나스 에게서도, 신앙과 이성에 대한 주장을 명철하게 분별함에 있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은 흔히 알려진 것보다 큽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퀴나스의 사고 안에서 만났다고 주장할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아퀴나스의 운명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성급한 일입니다. 반대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의 우수성은 토마스주의를 포함한 중세의 종합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신학이라는 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스콜라 철학은 기독교 변증론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왜곡하거나 오역한 것이라는 비아냥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붙들고 씨름해야 할 문제를 고르는 것과 그 해답에 대해 어떤 중대한 제안들을하는 것은 신학과 철학을 함께 바라보며 이 둘을 연결시켰던 것에서 나온 것이며, 이와 같은 의미에서 철학의 사명을 '신학의 시녀'라고 이해한 데서 온 것이라는 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권위로 인해 아우구스티누스의 형이상학적 관념들이 기독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넓은 범위의 체계들 속으로 들어왔으며, 때때로 이것은 철학의 엄청난 혼동을 가져왔습니다. 아퀴나스와 스코투스 같은 사상가들이 비록 계시와 이성의 각각의 기능을 보다 분명하게 분석함으로써 이러한 혼동을 배제했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철학을 신학 절대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게 했다고 할지라도,그들의 철학들은 신앙과 신학의 영향에 의식적으로 열려 있었고, 그들의 철학적 분석들은 신학적 설명의 기능을 하였습니다. 더 강력하게 이러한 주장은 보나벤투라와 다른이들의 보수적인 아우구스티누스주의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세 철학이 베일에 가려진 변증론으로 단순히 묵살될 수는 없다. 초점은 오히려 중세 사고는 진리의 통일성과 위계 질서를 강력하게 믿었고, 신앙의 진리는 이성을 조명하며 이성으로 하여금 최종적인 목적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믿었다는 데 있습니다.나는 하나님과 영혼을 맡기를 원합니다.이 말은 스콜라 사상의 핵심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본성과 인간의 상황,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이라고 하는 신학적 문제들은 인간의 삶의 기본적인 질문들로 받아들여집니다. 그의 초기삶의 관점에서 어떤 자격들이 요구될지는 몰라도, 위대한 스콜라주의 학자들 가운데최초였던 안셀름은 신앙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던 그의 시도에 있어서, 인간의 죄악 된 상태에 대한 그의 분석에 있어서, 혹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구원의 신비를 설명함에 있어서 스콜라 사상의 원형입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똑같은 주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즉 하나님, 그분의 본성과 삼위일체의 삶, 인간, 인간의 창조, 죄악, 인간이 필요로 하는 은혜, 그리스도와 그의 성례들. 이모든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지도 아래 해석되었고, 심지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력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훨씬 넘어서서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그렇게 해석되었습니다. 우리는 신학의 본성을 규정하려 하거나 성서 석의의 참된 원칙을 발견하려는 시도들 속에서 똑같은 특유의 관심을 보게 됩니다. 그 관심이란 문예와 과학의 기술들을 조정하여 신앙에 봉사하려고 하는 것이다. 철학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신앙의 입장에서 이해를 추구하는 다른 차원을 우리가 갖는다는 인상을 거부하는 것은 아무리 해도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존재, 창조주 하나님, 피조물 인간,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인간,이러한 것들이 중심 주제들입니다. 보편자들의 문제와 같은 질문이 스콜라주의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면, 그것은 그 해결책이 하나님에 대한 철학적 접근에 영향을 미치고, 인간의 도덕적 삶을 위한 하나님의 법칙을 해석하는 것에 영향을 미치고, 혹은 삼위일체, 인간의 죄, 구원과 성례에 대한 신학적 논의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그러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들에 집중하면서, 우리는 스콜라주의 학자들의 어떤 기독교적 관심들을 잘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될 본문들만을 고르려 하지 않을 것이며, 이와 똑같이 의미 있는 '중립적' 본문들도 역시 선택할 것입니다. 여기에 담겨 있는 자료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중세 사상의 가장 깊은 관심들의 일부를 연구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스콜라 신학으로
중세 스콜라주의는 기독교 신학이나 종교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만 흥미가있는 것은 아닙니다. 형이상학과 인간론에 대한 스콜라 학자들의 철학적 작품은 논리학과 과학 이론에 대한 후기 중세의 작품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그레코로만 서구문화와 사상의 연속성을 이해하는 데 어마어마하게 중요합니다. 또한 그 자체로도 대단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아퀴나스의 존재에 관한 형이상학은 존재 철학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기여를 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중세의 종합은 복음과 세상의 대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흥미가 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문화의 산물이며, 불완전한 것과 조잡한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 곧 창조주이시며 구속주를 의지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중세의 종합에 매우 독특한 흥미를 갖게 됩니다. 그러한 점에서 적어도 중세 스콜라주의는 모든 기독교 사상의 이상을 구현하였고, 오늘과 같이 혼란에 빠진 세상 속에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을 위한 풍부한 지혜를 제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