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vs 영지주의
전통'이란 물려받은 것,또는 넘겨받은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도 있습니다.이 말은 또한 물려 주거나 넘겨주는 행위를 뜻하기도 합니다.이레나에우스는 믿음의 규칙(regula fidei)이 사도적 교회 안에 충실하게 보존되어 있고, 정경 안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전통은 사도들의 유산으로 간주되었습니다.전통은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도록 교회를 이끌고, 인도하는 기능을 했습니다.그것은 성경 외에 또 다른 '계시의 은밀한 원천이 아니었습니다.이레나에우스는 그런 생각을 영지주의로 여겨 무시했습니다.전통은 교회가 성경의 색다른 해석을 채택하지 않고, 사도들의 가르침 에 충실하도록 도와주는 수단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어거스틴 vs 펠라기우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어야만 이룰 수 없고,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이루어주는 것입니다.아우구스티누스는 구원의 원천이 인간의 밖,곧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고 강조했습니다.구원의 과정을 시작하는 주체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십니다.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상황을 사뭇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았습니다.그는 구원의 원천이 인간 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개개의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을 지닌다. 그들은 죄에 속박되지 않고,구원을 얻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영지주의
영지주의 저술가에게 비밀스러운 가르침'이란 일종의 우주적인 암호와 같은 것이었습니다.누군가가 죽으면 그 사람의 영혼은 육체적인 감옥에서 해방되어 영광스러운 마지막 목적지를 향한 길고 복잡한 여행을 자유롭게 시작합니다.그 곳에 도착하려면 여러 가지 잠재적인 방해 요인들을 극복해야 하는데,그것이 곧 비밀스러운 지식이 필요한 이유입니다.어떤 영지주의 저술가들은 이 비밀스러운 가르침이 사도들을 통해 구전으로 전달되었고, 베일에 감추어진 형태로 성경 안에 간직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오직 특별한 방법으로 성경을 읽을 줄 아는사람들만이 공개되지 않은 그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다시 말해, 영지주의에 입문해 그 비밀을 아는 사람들만이 신약성경이 제공하는 구원의 축복을 누릴 희망이 있습니다.교회가 그런 가르침을 논박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습니다.따라서 영지주의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특정한 성경 본문을 해석하는 전통적인 방법이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여기에서 전통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의미했습니다.
아리우스 논리의 요약
성자는 다른 모든 피조물과 같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겨난 피조물입니다.아들이라는 용어는 다른 피조물들 사이에서 성자가 차지하는 위치를 강조하기 위한 존중의 표현입니다.그것은 성부와 성자의 본질이나 지위가 같다는 의미가 아닙니다.성자의 지위도 성부의 뜻에서 비롯한 결과다. 그것은 성자의 본질에서 자연스레 비롯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아타나시우스 논리 요약
어떤 피조물도 다른 피조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아리우스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피조물입니다.따라서 아리우스에 따르면,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실 수 없습니다.때로는 성경과 기독교의 예전적 전통을 근거로 약간 다른 형태의 논증적 방식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오직 하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하십니다.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거스틴의 입장
죄를 세대를 잊는 유전적 질병으로 다룹니다.그분을 통해 '나음을 받습니다. 구원이 의학적인 치유의 용어로 이해되었습니다.죄를 우리를 사로잡은 권세로 다룹니다.인간의 자유 의지는 죄의 권세에 속박된 상태입니다.오직 은혜만이 우리의 의지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그리스도께서 해방자, 곧 죄의 권세를 깨뜨리는 은혜의 원천으로 이해되었습니다.세 번째 비유는 죄를 법률적이고 법정적인 개념으로 다룹니다.죄책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진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살았던 로마 제국 말기와 같이 법에 큰 가치를 둔 사회에서 이것은 죄를 이해하는 데 특별히 유익한 개념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용서와 사면을 가져다주시는 분으로 이해되었습니다.은혜는 우리안에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구원적 임재로 이해했습니다.
펠라기우스의 입장
인간은 무죄한 상태로 태어나며, 고의적인 행위를 통해서 죄를 짓습니다.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들만이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은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시는 정신적 깨닳음(도덕적 의무)으로 이해했습니다.그러나 인간의 본성이 부패했다고 믿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를 일종의 병원으로,곧 타락한 인간성이 은혜를 통해 회복되어 차츰 거룩해져 가는 장소로 간주했습니다.
플라톤주의
플라톤주의의 경우는 말씀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로고스를 관념의 세계과 일상의 세계를 연결해주는 중재적 원리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이 용어가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습니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유스티누스는 이 말씀을 근거로 로고스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분을 통해 가장 온전하게 드러났고, 거기에서부터모든 지혜가 비롯한다고 주장했습니다.소크라테스를 비롯해 로고스에 따라 살려고 애쓰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유스티누스의 이런 가르침은 논란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클레멘트
주님이 헬라인들을 부르시기 전까지 그들에게는 철학이 주어졌습니다.율법이 히브리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였던 것처럼 헬라인들의 경우는 철학이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이처럼 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되는 길을 준비하는 예비 수단이었습니다.그리스도께서 철학의 완성이요 성취입니다.
철학, 초등교사
철학자로 불리는 사람들,특히 플라톤주의자들이 우리의 믿음에 일치하는 참된 것을 말했다면 그것을 거부하지 말고,우리 자신을 위해사용해야 합니다.이방 학문이 전적으로 그릇된 가르침과미신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거기에는 진리로 사용하기에 매우 적합한, 뛰어난 가르침과 탁월한 도덕적 가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그 안에서는 심지어 유일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관련된 진리들이 더러 발견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이것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금이요 은입니다.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창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라는 광산에서 캐낸 것입니다.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릇된 것들은 버리고 진리만을 골라내 복음 선포를 위해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